필라델피아 한인 천주교회 - Holy Angels Korean Catholic Church of Philadelph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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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그도 아픈 사람이다

3/23/2012

 
함 태기(루까)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내 사랑을(영화 별들의 고향에서) 
"조그만 길가 꽃잎이 우산 없이 비를 맞더니/지난밤 깊은 꿈속에 활짝 피었네."(영화 어제 내린 비에서).
아시다시피 소설가 최인호의 소설을 영화화한 곳에서 나오는 노래입니다. 살짝 살짝 에로틱한  그의 글은 소설에서 영화에서 대히트를 칩니다. 고교시절 중고생 관람불가인 그의 영화를 몰래보고 또다시 그의 소설이 연재되었던 신문을 도서관에서 쌓아놓고 보았던 기억이 나는데 그의 소설은 푸릇푸릇하고 날카로운 글로 젊은이들을 열광시켰으며 그가 가사를 쓴 송창식의 고래사냥, 이장희의 그건너 등은 통기타 문화에도 기여를 합니다.   

그는 1945년생으로 18세 고교 2학년 때 신춘문예 입선하고 27세 때 소설 별들의 고향으로 인기작가로 등장하며 43세에 가톨릭 세례를 받고 63세에 침샘암으로 투병 생활하는 중으로 그가 써서 발표한 글은 한국문학에 큰 획을 긋고 최인호는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가톨릭 세례를 받은 이후에는 불교 및 역사에 관한 소설을 써오면서 그의 문학적인 보폭은 더욱더 넓어졌으나 너무 잘나가던 그런 그에게 암이 발병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씁니다. “2008년 여름 저는 드디어 ”내 차례를 맞아 암이라는 병을 선고받고 가톨릭 신자로써 절망하고 기도하고 희망을 하는 혹독한 할례식을 가졌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이 세상 어디선가 울고 있는 누군가들 즉, 병들었거나 경제적으로, 인간관계 등 여러 가지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잘나가던 그 역시 순서가 되어 아프다는 것을 알립니다.

그는 암 발병 후에 이것이 죄 때문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병원에서 어린이 환자를 보면서 자기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그는 저 아이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요한 복음말씀을 떠올리며 죄의식에서 해방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최인호는 암 발병 후 대중적인 글보다는 가톨릭 주보에 많은 글을 올리고 있는데 가끔가다가 우리 성당주보에도 그의 글이 실리어 많은 생각을 하게합니다. 그는 주 하느님을 스스럼없이 아주 개인적인 아빠 abba라고 부르고 있으며 아픈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를 걱정하고 내일을 두려워 말라, 주님이 우리를 벼랑 끝으로 부르는것은 우리가 날개를 가진 거룩한 천사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라고…….

누구나 다 자기 차례가 옴을 압니다. 그러나 누구나 애써 외면하고 집착합니다. 그 집착을 놓을 때 행복이 아침 햇살처럼 와 닿음을 압니다만 쉬운 일이 아님에 매번 회개합니다. 인생은 행복의 연속이 아니라 구름 속에서 순간 순간 비치는 햇살임을 압니다. 고난 속에서 잠시 잠시 맛보는 기쁨은 행복을 줍니다.

최인호 역시 매번 투병에서 오는 고통으로 절망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잡으려고 노래하고 글을 계속 쓸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에게 쓰는 글일 것입니다  그리고 문학적 명성과 그에 따른 부를 내려놓고 어디선가 울고 있는 사람과 아픔을 같이하면서 서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사순시기입니다 세상 사람은 어떤 이유로든 너도 아프구나 하고 느낄 때 서로 불쌍하고 겸손해질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다시 생각하는 부활이 되었으면 합니다.


     

인색한 좀팽이 회색분자의 패륜

3/17/2012

 
강 남옥(율리아) 

어린 시절 입에 붙은 노래나 금언은 때로 평생의 기억을 가지기도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위안부로 끌려가 질곡의 세월을 살았던 한 할머니가, 태국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한국말을 죄 잊었지만 놀랍게도 ‘아리랑’을 부르던 것을 TV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저도 가락만 들으면 자동으로 입에서 튀어나온 노래가 있으니, 전에 한 번 소개했던 원동교회 주일학교에서 배운 노래입니다.
 하늘 계신 아버지/밥과 반찬 주시고/매일 먹게 하시니/항상 감사합니다. 라는, 춘궁기에 만들어졌을 법한 개발 도상 이전의 대한민국 어린이 용 식사 전 기도 노래와 하느님이 세상을/이처럼 사랑하사/독생자를 주셨으니/누구든지 주를 믿으면/멸망하지 않고/영생을 얻으리로다/영생을 얻으리로다. 라는 크리스천 핵심 기도 노래입니다.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아이들이 ‘독생자’니, ‘멸망’이니, ‘영생’이니 하는 어휘를 알 리가 없었겠지만, 언어의 역사성이랄까요? 반복 주입, 학습 되면서 자연스레 체득이 된 것입니다. 요즘은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고 노래 부르고 손뼉쳤지만 평생 그 사랑을 노래 가사로만 알고 살아온 것은 아닌가, 내 스스로 엎어지고 거꾸러지며 하느님을 탐구하는 와중에 눈이 번쩍 뜨이도록 확인한 사랑이 아니라, 타인의 체험과 간증으로 만들어진 노래 가사를 막연히 선험적 차원에서만 받아들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뭔일이 좀 풀리면 주님은 감사한 존재지만, 일이 조금이라도 꼬이면 도대체 주님께서 내게 해 주신 게 뭔가? 그 당장에 발칙한 생각을 하는 존재가 인간 아닙니까. 태어났으니 그 생명도 당연한 것 같고, 입에 밥 들어가니 그 먹거리도 당연한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애초 불가능한 존재가 인간 아닌가도 생각합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힘들다는 보편 공감대가 넓은 말을 두고 보면, 우리(나)의 이 발칙한 패륜은 이해 될 만하다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올인’ 아니면 ‘배신’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삶의 순간마다 해야 하는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도 ‘네가 차던지 뜨겁던지 않고 미적지근하면 뱉어버리겠다’ 하셨잖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저는 평생 회색분자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믿기는  합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참으로 인색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데 인색했던 정도의 만분의 일만, 세상의 쓸 데 없는 일에 관심과 시간 내주기에 인색했더   라면 백만장자 됐을 것입니다. 작은이에게 베푸는 사랑이  주님께 드리는 사랑이라는 것도 허전한 말입니다.   도대체 체험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국정 교과서(성경)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참고서와 영상 자료와  녹음 자료를 듣기도 합니다. 어떤 땐 낄낄대며 웃고, 어떤 땐 아, 그 사람 참 말 잘한다, 감탄도 합니다. 어떤 신부님의 녹음자료를 듣는데, 그 신부님 제가 알지도 못하는데 목소리만 듣고 눈물이 그냥 흘러내립니다. 제가 무슨 족집게라고 ‘나 같은 사람이 앞뒤 없이 우는 것으로 보아 필시 성인이로다!’ 판단합니다.

그리고 또 변명 거리를 찾아냅니다. 자라면서 공부할 때, 세상 물리 다 알고 했나? 하라니까 닥치고 하다 보니 이것저것 꿰맞추고 물리 터득했지~ 주님 사랑 아는데, 그 큰 사랑을 어찌 조감부터 하면서 시작할 수 있나? 그저 하라니까  하고, 외우라니까  외우고, 들으라니까 듣고 하다보면, 내 삶의 조각조각 안에 스며들어  있는 주님 사랑 퍼즐 맞추듯이 맞추고, 그 사랑의 그림 어렴풋이 보일 때가 있지 않겠나~ 말이나 못하면요. 그러면서 “으음…그래도 오늘은 좀 피곤하군, 그냥  자고, 누워서 저녁 기도 해도  마, 안 하는 것 보다는 나으리니…” 이렇게  하루하루, 도저히 ‘올인’ 되지 않는, 피 흘린 성인들 음덕 덕분에 이어져 온 좀팽이 같은 삶, 이어가고  있습니다. 


     

새벽 창가

3/2/2012

 
 박 준업(스테파노)

하루건너 비가 내리고 아니면 잿빛 하늘이 여러 날 계속 되는 동안 날씨 탓인지 마음도 어둡고 찌뿌듯 합니다. 한국은 기상청 기록이 갱신되는 폭설과 혹한이 몰아치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며칠이 지 나도 디오니시아의 감기 기운이 떨어지지 않더니 오늘 새벽엔 창백한 얼굴로 더 못 참겠다고 쓰러져서 Emergency로 달려갔습니다. 어떻게 운전하고 이 먼 곳을 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정밀 검사 가 시작되고 즉시 수술실로 실려 가는 것을 보면서 ‘이제 우리 차례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5시간이 넘는 수술 시간은 아득한 무인도에 혼자 버려진 느낌 이였습니다. 걸려오 는 아이들 전화도 내겐 아무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묵주가 땀에 흠뻑 젖고 온 몸이 떨렸습니다.
오 주님, 도와주십시요!

수술실에서 나온 집도 의사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럭키한 수술이었다고 하고 환자도 안전하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수술실로 갔습니다. 잠시 후 코, 입, 손가락 등에 여러 개의 호스가 끼여 있는 아내가 실려 나왔습니다. 흰 석고상 같은 얼굴을 보면서 의식은 없지만 숨을 쉬고 있다는 안도감에 눈물이 핑 돌았습 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2월 한 달 이렇게 생의 본질적인 문제에 휩싸여 지나갔습니다. 
“나는 너를 창조했다. 네가 생활하고 체험하는 그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너를 창조했다. 너는 나의 권 능에 속해있다. 나는 너에게 너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주었다. 너의 삶에는 많은 희망이 주어져 있는가 하면, 또 많은 위험도 주어져 있다. 너는 스스로에 대한 긍지를 가지고, 동시에 허약함을 면치 못한다. 너는 무슨 일을 완성시킬 힘을 가졌고, 동시에 무능을 체험한다. 너는 곤경과 피로와 패배를 체험하고, 동 시에 너는 너에게 끊임없는 소망을 주었다. 건강, 완전무결, 부유, 영광, 인정, 의미로서 충족된 인생. 따 뜻한 인정, 우정, 사랑, 포옹, 너 안에 느낄 수 있는 모든 가능성과 너희 마음을 압박하는 한계를 함께 주 었다. 이 모든 것은 너희를 위한 나의 은혜이다. 나는 영원한 사랑에서 너에게 선사한 너의 창조된 본성 이다. 나는 내 뜻을 너 자신을 통해서 드러내보였다. 너희 실존적 형태, 너희 순간적 상황, 너희 변하는 의식상태의 사소한 기쁨과 죽기까지 괴롭고 몸서리치는 권태를 통하여 나는 나의 뜻을 너에게 알려 주었 다. 너의 일생의 어떠한 일도 중립적이거나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할 것은 없다. 너의 존재는 있는 그대로 경외스러운 것이다.”(김수환 추기경님 글 중에서) 

이른 새벽, 병원 창가에 서서 잠든 세상을 내다봅니다. 매일 매일 침묵하는 내 삶, 몸살처럼 나는 삶을 앓고 있습니다. 세차게 뛰는 내 심장 소리를 듣습니다. 이제 막 아침 체크를 하고 모두 정상으로 돌아오 고 있다고 했습니다. 알약 하나를 먹고 잠든 아내를 응시하며 인간은 숙명적으로 구조적으로 병을 앓게 되며 치유도 되고 죽어 가기도 하는 육체의 질서를 다시 깨닫습니다.  
살아오는 동안에 밝음이 강할수록 그 이면의 그늘도 짙다는 것은 생의 질곡을 겪어온 인생들은 모두 알 고 있을 것이리라……. 나는 가슴 한 구석 빈자리, 지금부터 기도하며 채워 나갈 것입니다.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2/24/2012

 
김웅옥 (카타리나)

오늘 저에게는 예순 다섯 번의 사순시기를 맞이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사순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 지를 알게 된지는 약 삼십년이 되었습니다. 사순시기 동안 유혹을 뿌리칠 수 있도록 마음을 정리하고 기 도를 하는데도 조금만 주님과의 끈을 느슨하게 잡으면, 어느새 유혹에 그물에 걸려서 허우적거린답니다.

얼마 전 가벼운 교통사고 후 혈압이 급속도로 올라가더니 내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혈압 약을 먹지 않고 식이요법으로 하려고 하는데 사탄들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나를 꼼짝할 수 없도록 유혹을 한답니다. ‘얘, 이것 네가 좋아 하는 음식이잖아 조금만 먹어봐, 아마 입에서 살살 녹을 거야. 그리고 먹고 나서 물을 많이 먹으면 희석이 되어 혈압과는 관계가 없게 돼.’라고 하는가 하면 ‘너는 잡식 동물의 돼지 띠잖아, 많이 먹어도 관계없어. 먹고 죽은 놈은 때깔도 좋다고 하더라.’ 또한 혈압에는 싱겁게 음식을 먹 으라고 하여서 간을 하지 않고 먹으려고 하면 ‘이게 무슨 맛이니? 입에서 넘어 가지가 않잖아, 간장을 조 금만 넣어서 먹어, 간장 조금 넣었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야,’라고 하는가 하며, 머리 무게가 너무 무겁도록 나를 짓눌러서 운동을 하여 풀어야겠다고 했더니 ‘오늘 같이 추운 날 나가서 걸어봐라, 아 마 혈관이 터져 버릴 거야,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반신불수? 아니면……? 너, 생각하기도 끔찍하 지? 그냥 집에서 쉬는 것이 나을 거야.’라며 나를 유혹하여 아무것도 못하게 나를 묶어 놓고는 나의 등 뒤에서 킬킬 거리며 놀려 대고 있답니다.

이러한 나의 모습을 보면서,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의 단식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악마의 유혹에 이끌려 이리 저리 돌아다닐 것이 뻔합니다. 끼를 걸러 배가 고프면 아무 생각도 안 나고, 머리가 아프면서 먹을 것만이 머리에서 맴도는데, 어떻게 예수님은 일주일도 아닌 사십일 동안이나 이를 물리칠 수 있으셨을까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려면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굳게 믿는 마음에서 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굳게 믿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유혹도 뿌리칠 수 있으셨습니다.

나의 믿음은 발바닥 신자로서, 주위를 두리번거릴 뿐,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지만, 이번 사순 시기만이라도, 유혹에 흔들리게 만드는 나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사탄의 무리를 모두 재거하 여,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가며, 내가 변화되도록 노력하여, 하느님의 올바른 자녀가 되도록 노력하렵니 다.

 

들것에 담긴 사랑

2/18/2012

 
강 경숙(멜라니아) 

어린 날, 초등학교에 갓 들어갔던 무렵, 다리를 심히 절었던 그 아이는 우리집에 자주 놀러왔습니 다. 한여름 긴 방학동안, 놀이 기구라고는 상상도 못하던 그 시절, 봉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지던 장독대 옆에서 시골의 두 아이는 흙 마당에 막대기로 그림을 그리고 지우면서 뜨거운 햇볕아래 더운 줄도 모르고 잘 놀았습니다.  

“친구”라는 어렴풋한 개념의 그 아이가 좋아지는 만큼, 불편한 다리를 질질 끌며 나와 함께 잘 놀 아주는 아이의 시선을 차마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녁 해가 기우는 대문 밖으로, 절름거리 며 사라져 가는 그 아이의 뒷모습을 애잔하게 바라보며, 왜 저렇게 되었을까 ? 아프진 않을까? 나을 수는 없는 것일까? 차라리 나도 저렇게 되면 덜 미안할 것 같은데……. 어린 시절 생각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다녔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쌍한 이들과 함께 하시려고, 불행한 이들을 홀로 둘 수가 없어서 그분, 우리의 주님 은 이 세상에 계시나 봅니다. 저 높고 영광스러운 자리도 마다하시고, 불평할 자격도 없는 한낱 피조 물들 사이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데리고 오시오,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소. 고쳐주겠소. 편히 가시 오, 그리고 하느님께 감사하며 행복하시오.”

이 몇 마디 속에서 그분의 사랑은 용암처럼 녹아내리고 그분이 머물던 곳마다 문전성시를 이루었습 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그분의 이름으로 두세 명 이상이 모인 곳에는 어김없이 찾아오시니, 바로 믿 음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안에 현존하시는 엄청난 능력을 우리는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들것을 만들고자 합니다. 올 여름에 있을 성령안의 새 삶 세미나는 들것을 만드는 작업으로 시작합 니다. 그분의 소문은 들었으나 영혼과 육신의 중풍에 시달리며 꼼짝없이 드러누워 어찌 할 줄 몰라 하는 우리의 친구들을 그분께로 운반해 갈 것입니다. 정성어린 기도의 꽃들로 들것 주위를 곱게 장식 하고 간절한 소원의 표지판에 친구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새기어 그분이 알아보실 수 있도록 높이 매 달을 것입니다. 

전혀 새로운 삶으로 인도할 사랑의 그 들것은 어김없이 예수님 앞에 도착할 것이고 그분의 축복 속 에 우리의 친구들은 온전한 몸과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 기쁨의 화관을 쓰고 자유로이 걸어서 돌아올 것입니다. 예수님과 친구들의 지극한 사랑의 징표인 그 들것을 소중히 들고서 말입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2/10/2012

 
이 상인(부루노) 

지난 주말이 대한(大寒)이 가고 한 해 절기가 시작하는 입춘 (立春)이였습니다. 立春하면 떠오르는 고사성어가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 하여 집집마다 대문이나 기둥에 써서 붙여 두 시던 조상님들의 생활의 지혜를 잊을 수 없지요. ‘立春大吉 建陽多慶, 立春大吉 萬事亨通, 立春大吉 萬 福雲興’ 등이 있으며, 참고로 그밖에 널리 쓰이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國泰民安 家給人 足, 掃地黃金出 開門萬福來, 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 天增歲月人增壽 春滿乾坤福萬家, 門迎春夏秋冬 福 戶納東西南北財’.  

한겨울의 모진 추위와 배고픔과 어려움을 견디는 힘은 봄이 오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봄은 꿈 과 희망을 부르는 말이지요. 날로 더해가는 경기의 둔화로 한숨과 절망으로 지새우는 우리 형제자매님 들에게도 새해 새봄은 꿈과 희망과 사랑이 넘치는 계절이 되였으면 좋겠습니다. 

입춘은 24절기의 하나로 양력으론 2월 4일경, 음력으론 대개 정월의 절기(節氣)로 (올해는 섣달에 입춘이 들었지만) 동양에서는 이 날부터 봄이라고 합니다. 입춘의 전날을 절분(節分)이라 하여 철(계 절)의 마지막이라는 뜻으로 이날 밤을 ‘해넘이’라고 부르며 콩을 방이나 문에 뿌려서 마귀를 쫓고 새해 를 맞는다고 합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입춘 15일간을 5일씩 3후(候)로 나누어, 첫 5일은 동풍이 불어 서 언 땅을 녹이고, 다음 5일은 동면(冬眠)하던 벌레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마지막 5일은 물고기가 얼 음 밑을 돌아다닌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농가에서는 보리의 뿌리를 캐어보고 그 해의 농사를 점치기도 합니다. 보리의 뿌리가 세 개 이상이면 풍년이 들 징조이고, 두 개이면 평년작이요, 한 개이면 흉년이 들 징조라고 합니다. 

입춘의 세시풍속 속에 담긴 의미들은 예나 지금이나 산업(농업)이 융성하고 나라가 편안하며 집안에 재물을 비롯한 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소박한 기원들이 담겨 있습니다. 복을 기다리고 복 받기를 좋아 하면서도 복 짓는 데는 좀 소홀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의 한 주간이 되였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우리 나름의 인사말대로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만 말하지 마시고, 주님 말씀을 몸소 실천하며, 나보다 부족한 이를 위해 함께 나누며 사는 한 해가 되였으면 합니다. 나이가 들면 몸도 마음도 추워 집니다. 더 어려운 것은 희망도 할 일도 없다는 것이지요. 희망이라는 불씨는 내 스스로가 부지런히 가꾸지 않으면 소멸되고 말지요. 한 번 消滅데면 다시 붙이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적당한 공기와 탈 수 있는 소재가 있어야 함은 물론, 열기가 모아지지 않으면 소생하지 않듯이 늘 생각하고 가꾸고 부족함을 채워서 꺼지지 않는 촛불이 되어야 합니다. 

몸이 제일이라, 육체적인 운동만 할 것이 아니고, 하루에 한번 이상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의 시간을 가지고 정다운 지인들과 꾸준한 대화를 통해, 또는 컴퓨터나 독서로 새로운 지식을 쌓아가는 생활 습 관을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흑룡의 한 해가 벌써 한 달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빠른 세월인 데 무얼 주저하시겠습니까? 지금이 바로 그 때요, 지금이 바로 한번 밖에 오지 않는 그 시간입니다.

 

‘고통은 기쁨과 희망을 확인해주는 은총’

2/3/2012

 
박성우 요한 주임신부님 

우리들은 다소간의 차이가 있지만 많은 고통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누구에게나 각양각색으로 찾아오는 고통 앞에서 아파하기도 하고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게도 됩니다. 특히 착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받게되는 고통은 풀 수없는 수수께끼입니다. 더구나 남에게 그렇게까지 피해를 주고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잘되고 크게 성공하는 경우를 볼 때 우리는 무한한 사랑의 하느님께 대한 회의와 실망까지도 느끼게 됩니다.  

제1독서에서 욥은 ‘인생은 땅위의 고역이요, 날품팔이와 같은 나날들,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라며 희망이라고는 단 1%로도 생각할 수 없는 고통의 현실에 항거합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도 역시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병자와 마귀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며 해가 지고 저녁이 되서야만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박쥐처럼 몰래 움직여야만 했던 병자들의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진정 괴로웠기에 어둠을 택해서라도 몰래 예수님을 찾아야 했던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예수님께서는 온갖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여기서는 그 누구도 예외 됨이 없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든 간에 어떤 잘못을 저질렀던 간에 예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모두가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으며 고통에서 희망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께 의지하여 한발자국 앞으로 다가설 수 있는 용기,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안에서 희망으로 계시는 주님을 만나볼 수 있고 치유됨을 약속받게 됩니다.  

사실 고통을 당할 때 이를 견디어 내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힘들어 아파하게만 되지만, 푸념보다는 ‘주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하고 용기있게 애원하고 매달려야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내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고통 안에서 이미 나와 함께 지고 계셨던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은 바로 기쁨과 희망을 확인해 주는 하나의 신비한 은총입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주님께 애원하며 다가서야합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깨달음만으로는 너무나도 나약한 우리 인간이기에 이러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또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온갖 병자 고치기 위해 바쁘신 예수님께서는 몸소 새벽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크든 작던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을 경험할 때 단지 괴로워 할 것이 아니라, 바로 그때가 기도가 필요한 순간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이러한 기도야말로 우리의 고통을 희망으로 충전시키는 밧테리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사랑하는 본당 교우 여러분.

이민 사회에서 오는 모든 고통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기쁨과 희망을 볼 줄 아는 교우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겪는 고통들은 하느님 나라의 더욱 더 큰 은총을 위한 준비의 과정임을 깨닫고, 언제나 하나된 마음으로 함께 사랑과 관심을 나누는 이쁜 말과 배려있는 행동으로 주님께 한발자국 더 다가서시길 기도드립니다.

악령에 묶인 영혼을 구하소서

1/27/2012

 
 양 경숙(미쉘)  

어젯밤 갈릴래아 호숫가를 휘몰아치던
거센 폭우와 매서운 바람을 꾸짖어 잠재우시고
새벽녘에야 건너편 카파르나움 마을로 내려가
회당에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던 예수님 

파도가 배를 삼킬 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풍랑 속에
사람들은 몹시 지쳤고 우리의 삶은
벼랑 끝에 와 있다고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닫힌 문이 열리듯 햇빛이 쏟아지고
바위처럼 단단한 놀라운 믿음이
모든 사람들 마음 밭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복잡하고 딱딱한 율법 속에 갇힌 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 말씀에는 생명 같은 힘이 봇물처럼 터지고
하루 하루를 살얼음판을 걷는 사람들에게 
죄인이나 몹쓸 병을 앓는 사람 안에도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온 몸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이 때 그 회당 안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께 따지며 묻습니다.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예수님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던 악령은
두렵고 무서워서 벌벌 떨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넘어뜨리고 부셔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빈 집을 제 집처럼 차지하고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을 파괴하고 굴복시켰던 악령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의 명령에 악령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갑니다.
율법 학자들은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했지만
예수님처럼 악령에 묶인 사람을 
말 한 마디로 고쳐 준 적이 없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쥐고 자연과 악령까지 복종시키는 주님
 누가 감히 창조주이신 당신의 명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 것에 매달려 당신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성령으로 더러운 영들과 싸울
 무기조차 갖지 못한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소서.
 수천이 넘는 악령들을 몰고 와 폭풍처럼 활동하는
 악의 세력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지 못하도록
 성령으로 가득 채우소서.  

 우리의 영혼이 깊은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불평, 원망, 분노를 몽땅 쏟아 버리고
 깊은 물속에 가라앉은 희망의 깃발을 건져서
 가슴 마다 기쁨으로 펄럭이게 하소서.

to edit.

감사와 양보

1/20/2012

 
                                                                                                                                                                                                       설 금호(마리아) 

얼마 전, 2차선이 1차선이 되면서 제가 먼저 진입 됐고, 뒤에 오던 차가 옆으로 오다가는 뒤로 갔습 니다. 몇 불럭 후 다시 나타난 2차선은 좌회전 도로였으며, 뒤차가 분명 그 선으로 갔는데 갑자기 제 앞 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작은 상처 하나 없는데도 자기는 바쁜데 왜 양보를 하지 않았느냐며 제 돈으로 자 기 차를 고치겠다고 큰소리로 난리를 쳐댔습니다.  

양방의 진술에 자기는 신호 대기 중이었는데 제가 사고를 냈다고 했습니다. 경찰도 그가 거짓 같은데 직접 보지를 못했고 현재 경찰서에 들어와 있는 목격자의 증언을 확인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며칠 후 증 인의 증언이 제가 피해자라는 소식에 우리는 깜짝 놀랬습니다. 누구의 잘못을 떠나 각박한 요즘 세상에 도 정의의 사도가 존재한다는 감동에서였습니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여자?, 남자?, 젊은이?, 노인? 그 때부터 증인에 대한 온갖 상상으로 감사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가해자가 재판을 신청했기에 출두하라 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코트에 들어서는 가해자는 팔이 모자잘 정도의 서류 뭉치를 든 변호사를 대동하고, 자신은 아기 침대 만큼 긴 3단으로 접은 두툼한 상자들 든 모습은 가히 위압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준비물만 봐도 나는 꼼 짝없이 거짓말쟁이가 될 판이었습니다. 드디어 판사 앞에 선 그의 변호사, 서류뭉치 중에서 겨우 몇 장 의 종이로 변론했습니다. 뒤이어 가해자가 나열하는 정체불명의 상자가 미처 펼쳐지기도 전에 판사는 가 해자를 퇴장시켰습니다. 애써서 만들었을 사고 현장의 사진들이 제 역할을 하기도 전에… 다음은 저의 증인 차례, 날카로운 판사의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사고의 상황을 차근차근 진술 하는 증인, 그분은 더욱이 증거물로 가져온 그 사진들을 빌려서까지 세심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친구는 고맙게도 우 리를 위한 사진들이라고 익살을 떨었지만 극도로 긴장한 저에겐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흡사 가해 자 편인 듯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판사의 질문들이 증언 순간을 무너트릴 듯했기 때문에. 다음 순간 대책 없이 울어대는 저를 보며 증인은 "나도 모든 것을 다 보고 들었다, 네가 이겼는데 울 이유가 없다" 며 저를 감싸 안았습니다. 

온갖 악이 요동치는 이 세상, 흙탕물을 정화시키는 도토리 같은 사람이 있다는 감동에 저는 더욱 설게 울었습니다. 그렇게 울다 그만 아차! 증인의 신분도 모른 채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리석음을 후회하며 가슴을 쳤지만 애석하게도 증인은 떠난 후였습니다. 노인임에도 큰 키에 세련된 복장과 체격, 짧은 수염 사이로 보이는 인자한 미소는 마치 성스러워 보이는 예수님 모습 같았습니다. 저는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분을 하느님께 감사와 존경의 기도를 죽을 때까지 요청할 것입니다, 또한 저를 추월하려든 가해자에게 양보 못했던 용서도 함께. 증인 닮은 복음 말씀이 있습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사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하 세요, 이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고린1 7,29)  

욕심 많은 한 여인이 좋은 집과 아름다운 치장을 하며 살던 어느 날 시한부 인생으로 생을 마감한다면 과연 그 여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누리던 영화와 부는 아무 의미도 없겠지요. 우는 사람, 기쁜 사람 다 끝입니다. 하느님 차원에서는 이 모두가 아무 것도 아니니까요. 성경의 차원 또한 우리와 다릅 니다. 먼지만한 인간의 존재가 어찌 헤아릴 수 없이 큰 하느님의 법칙을 안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미칠 피해가 두려워 못 본 척 눈감는 세상에 자기의 이익을 구치 않고 정의감 넘치는 증인 같은 사람들, 그 들이 존재하기에 세상은 형체뿐만 아니라 온전한 세상으로 계속 존재하리라 믿습니다. 이 사건은 양보의 미덕은 물론 평생 잊지 못할 가장 멋진 하느님의 교훈이셨습니다.

우리의 선교는 이렇게 - 박 은수(요한)

12/4/2011

 
이 글을 그저 저의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수필로 쓸까 합니다. 순교의 원형이신 예수님을 닮은 우리가 될 수 있게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선교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루카 22.14-20)


교회의 본질은 선교인가 합니다. 선교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남에게 베푼다는 뜻이 되겠지요. (베풀선 宣, 가르칠교 敎) 그레고리오 교황의 말씀에서 “사람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은 예술 중의 예술”이라고 하셨고 그러므로 복음을 이웃에게 선포하는 이는 ‘최고의 예술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는 가정 복음화부터 시작하여 이웃으로 퍼져나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모든 신자들은 교회의 으뜸 사명인 복음 선포로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먼저 선교 현장에서 입교 대상자를 선택했다면 무조건 교리실에 인도할 것이 아니라 먼저 그의 믿음의 척도를 test 해 본 다음 영적의 어려운 신앙생활에 대한 심각한 고민도 함께 풀어준다면 이것 역시 錦上添花(좋은 일에 또 좋은 일을 더함)일 것입니다. 신부님의 사목 활동을 우리 신자들이 이러쿵 저러쿵 간섭할 이유가 없음을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신부님의 사목 활동에 발을 맞추어 사목중의 하나인 선교를 다할 뿐입니다.


문제는 그 “선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가 문제가 되겠습니다. 과거에 집단적으로 선교에 임해 보았지만 시간 낭비로 효과 없는 결과만
본 것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앞으로는 수확 없는 선교를 지양하고 일대 일의 열매가 튼튼하게 열리는 그런 선교가 필요하고 열매가 튼튼치 않으면 땅에 떨어 지는 그런 열매가 결국은 도중하차하게 될 것입니다. 선교는 선교분과와 레지오 단원만이 하는 활동이 아니고 온  신자가 같이 하는 몫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전도서 6장 12절에 “하루살이처럼 덧없이 지나가는 짧은 인생에게 무엇이 좋은 일인지 누가 알겠는가? 죽은 뒤에 세상 돌아가는 일을 그 누가 알려주겠는가?” 과연 하느님의 말씀이고 깊이 묵상할 만한 구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 선교의 방법을 찾아 실행에 박차를 가해봅시다. 먼저 내 자신이 기본교리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인 교리를 모르고서야 어떻게 선교를 할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말하는 태도 그리고 질문보다는 재미있게 대화하는 것, 이 과정이 익숙해지면 서로 문답식으로 그 무엇을 풀어 나가면 좋은 효과를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신조로 살아왔는가를
로마서 15장 3절에서 설명 할 수 있고 사도행전 8장 30-31절에 “그 무엇을 설명해 주지 않으면 그들이 어떻게 그 진리를 알 수 있겠는가”를 설명해 줄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1개월 정도 대화를 나눈 다음에 교리실에 인도해 주면 대강 부담 없는 수업을 받게 될 것으로 믿는 바입니다.


어려운 교회공부를 마치고 세례를 받으면 신앙생활에 임하게 됩니다만 이제 그 다음이 큰 문제가 찾아옵니다. 신부님의 도움으로 영세는 했지만 미사에 참여해보니 그 무엇인가를 얻지 못하고 미사 참여 의식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 빠져 버리고 그 다음부터는 교회를 멀리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그런 고로 대부와 대모는 대자 대녀와 함께 영원히 산다는 의식아래 같이 신앙생활에 임했으면 합니다. 다시 말해서 대부 대모의 활동이 너무 미약하고 사명감이 없고 지도의식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세례식 때 대부 대모들의 역할이 그때만 효력이 있고 그 후는 그들을 방치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이 사람은 입교보다도 영세자의 관리가 절대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마
리의
양을 잃은 것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이것 역시 묵상할 만한 구절이라고 생각합니
다. 끝으로 이 두서없는 글을 읽어보시고 이에
동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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