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금호(마리아)
얼마 전, 2차선이 1차선이 되면서 제가 먼저 진입 됐고, 뒤에 오던 차가 옆으로 오다가는 뒤로 갔습 니다. 몇 불럭 후 다시 나타난 2차선은 좌회전 도로였으며, 뒤차가 분명 그 선으로 갔는데 갑자기 제 앞 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작은 상처 하나 없는데도 자기는 바쁜데 왜 양보를 하지 않았느냐며 제 돈으로 자 기 차를 고치겠다고 큰소리로 난리를 쳐댔습니다.
양방의 진술에 자기는 신호 대기 중이었는데 제가 사고를 냈다고 했습니다. 경찰도 그가 거짓 같은데 직접 보지를 못했고 현재 경찰서에 들어와 있는 목격자의 증언을 확인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며칠 후 증 인의 증언이 제가 피해자라는 소식에 우리는 깜짝 놀랬습니다. 누구의 잘못을 떠나 각박한 요즘 세상에 도 정의의 사도가 존재한다는 감동에서였습니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여자?, 남자?, 젊은이?, 노인? 그 때부터 증인에 대한 온갖 상상으로 감사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가해자가 재판을 신청했기에 출두하라 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코트에 들어서는 가해자는 팔이 모자잘 정도의 서류 뭉치를 든 변호사를 대동하고, 자신은 아기 침대 만큼 긴 3단으로 접은 두툼한 상자들 든 모습은 가히 위압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준비물만 봐도 나는 꼼 짝없이 거짓말쟁이가 될 판이었습니다. 드디어 판사 앞에 선 그의 변호사, 서류뭉치 중에서 겨우 몇 장 의 종이로 변론했습니다. 뒤이어 가해자가 나열하는 정체불명의 상자가 미처 펼쳐지기도 전에 판사는 가 해자를 퇴장시켰습니다. 애써서 만들었을 사고 현장의 사진들이 제 역할을 하기도 전에… 다음은 저의 증인 차례, 날카로운 판사의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사고의 상황을 차근차근 진술 하는 증인, 그분은 더욱이 증거물로 가져온 그 사진들을 빌려서까지 세심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친구는 고맙게도 우 리를 위한 사진들이라고 익살을 떨었지만 극도로 긴장한 저에겐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흡사 가해 자 편인 듯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판사의 질문들이 증언 순간을 무너트릴 듯했기 때문에. 다음 순간 대책 없이 울어대는 저를 보며 증인은 "나도 모든 것을 다 보고 들었다, 네가 이겼는데 울 이유가 없다" 며 저를 감싸 안았습니다.
온갖 악이 요동치는 이 세상, 흙탕물을 정화시키는 도토리 같은 사람이 있다는 감동에 저는 더욱 설게 울었습니다. 그렇게 울다 그만 아차! 증인의 신분도 모른 채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리석음을 후회하며 가슴을 쳤지만 애석하게도 증인은 떠난 후였습니다. 노인임에도 큰 키에 세련된 복장과 체격, 짧은 수염 사이로 보이는 인자한 미소는 마치 성스러워 보이는 예수님 모습 같았습니다. 저는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분을 하느님께 감사와 존경의 기도를 죽을 때까지 요청할 것입니다, 또한 저를 추월하려든 가해자에게 양보 못했던 용서도 함께. 증인 닮은 복음 말씀이 있습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사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하 세요, 이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고린1 7,29)
욕심 많은 한 여인이 좋은 집과 아름다운 치장을 하며 살던 어느 날 시한부 인생으로 생을 마감한다면 과연 그 여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누리던 영화와 부는 아무 의미도 없겠지요. 우는 사람, 기쁜 사람 다 끝입니다. 하느님 차원에서는 이 모두가 아무 것도 아니니까요. 성경의 차원 또한 우리와 다릅 니다. 먼지만한 인간의 존재가 어찌 헤아릴 수 없이 큰 하느님의 법칙을 안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미칠 피해가 두려워 못 본 척 눈감는 세상에 자기의 이익을 구치 않고 정의감 넘치는 증인 같은 사람들, 그 들이 존재하기에 세상은 형체뿐만 아니라 온전한 세상으로 계속 존재하리라 믿습니다. 이 사건은 양보의 미덕은 물론 평생 잊지 못할 가장 멋진 하느님의 교훈이셨습니다.
얼마 전, 2차선이 1차선이 되면서 제가 먼저 진입 됐고, 뒤에 오던 차가 옆으로 오다가는 뒤로 갔습 니다. 몇 불럭 후 다시 나타난 2차선은 좌회전 도로였으며, 뒤차가 분명 그 선으로 갔는데 갑자기 제 앞 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작은 상처 하나 없는데도 자기는 바쁜데 왜 양보를 하지 않았느냐며 제 돈으로 자 기 차를 고치겠다고 큰소리로 난리를 쳐댔습니다.
양방의 진술에 자기는 신호 대기 중이었는데 제가 사고를 냈다고 했습니다. 경찰도 그가 거짓 같은데 직접 보지를 못했고 현재 경찰서에 들어와 있는 목격자의 증언을 확인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며칠 후 증 인의 증언이 제가 피해자라는 소식에 우리는 깜짝 놀랬습니다. 누구의 잘못을 떠나 각박한 요즘 세상에 도 정의의 사도가 존재한다는 감동에서였습니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여자?, 남자?, 젊은이?, 노인? 그 때부터 증인에 대한 온갖 상상으로 감사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가해자가 재판을 신청했기에 출두하라 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코트에 들어서는 가해자는 팔이 모자잘 정도의 서류 뭉치를 든 변호사를 대동하고, 자신은 아기 침대 만큼 긴 3단으로 접은 두툼한 상자들 든 모습은 가히 위압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준비물만 봐도 나는 꼼 짝없이 거짓말쟁이가 될 판이었습니다. 드디어 판사 앞에 선 그의 변호사, 서류뭉치 중에서 겨우 몇 장 의 종이로 변론했습니다. 뒤이어 가해자가 나열하는 정체불명의 상자가 미처 펼쳐지기도 전에 판사는 가 해자를 퇴장시켰습니다. 애써서 만들었을 사고 현장의 사진들이 제 역할을 하기도 전에… 다음은 저의 증인 차례, 날카로운 판사의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사고의 상황을 차근차근 진술 하는 증인, 그분은 더욱이 증거물로 가져온 그 사진들을 빌려서까지 세심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친구는 고맙게도 우 리를 위한 사진들이라고 익살을 떨었지만 극도로 긴장한 저에겐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흡사 가해 자 편인 듯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판사의 질문들이 증언 순간을 무너트릴 듯했기 때문에. 다음 순간 대책 없이 울어대는 저를 보며 증인은 "나도 모든 것을 다 보고 들었다, 네가 이겼는데 울 이유가 없다" 며 저를 감싸 안았습니다.
온갖 악이 요동치는 이 세상, 흙탕물을 정화시키는 도토리 같은 사람이 있다는 감동에 저는 더욱 설게 울었습니다. 그렇게 울다 그만 아차! 증인의 신분도 모른 채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리석음을 후회하며 가슴을 쳤지만 애석하게도 증인은 떠난 후였습니다. 노인임에도 큰 키에 세련된 복장과 체격, 짧은 수염 사이로 보이는 인자한 미소는 마치 성스러워 보이는 예수님 모습 같았습니다. 저는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분을 하느님께 감사와 존경의 기도를 죽을 때까지 요청할 것입니다, 또한 저를 추월하려든 가해자에게 양보 못했던 용서도 함께. 증인 닮은 복음 말씀이 있습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사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하 세요, 이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고린1 7,29)
욕심 많은 한 여인이 좋은 집과 아름다운 치장을 하며 살던 어느 날 시한부 인생으로 생을 마감한다면 과연 그 여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누리던 영화와 부는 아무 의미도 없겠지요. 우는 사람, 기쁜 사람 다 끝입니다. 하느님 차원에서는 이 모두가 아무 것도 아니니까요. 성경의 차원 또한 우리와 다릅 니다. 먼지만한 인간의 존재가 어찌 헤아릴 수 없이 큰 하느님의 법칙을 안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미칠 피해가 두려워 못 본 척 눈감는 세상에 자기의 이익을 구치 않고 정의감 넘치는 증인 같은 사람들, 그 들이 존재하기에 세상은 형체뿐만 아니라 온전한 세상으로 계속 존재하리라 믿습니다. 이 사건은 양보의 미덕은 물론 평생 잊지 못할 가장 멋진 하느님의 교훈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