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 한인 천주교회 - Holy Angels Korean Catholic Church of Philadelph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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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떨어진 겨자 씨 한 알

6/16/2012

 
양 경숙(미쉘)

돋보기안경을 끼어도 잘 보이지 않는
땅위에서 가장 작은 먼지 같은 겨자씨여
풀잎의 숨소리에도 날라가 버릴 것 같은
그 가냘픈 몸속에 감춰 둔 놀랍도록 강인한 생명
주님. 우리의 마음 밭에도 소낙비처럼 내려 주시옵소서.

한 알이 땅속에 떨어져 열매를 맺을 때까지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황량한 들녘에서 
더위와 가뭄, 폭풍과 비바람, 천둥과 번갯불 속에
온 몸을 맡기고 인내하며 성장을 멈추지 않고
또 하나의 생명을 낳아 하느님께 바치는 씨앗의 신비로움이여

빼앗기고 차별만 받던 설움 많은 갈릴래아 땅바닥에
노오란 유채꽃 모양으로 피어나 바람이 이끄는 대로
햇볕을 덮고 밤이슬 먹으며
들풀에서 큰 나무로 자랐습니다.

구름떼처럼 몰려다니며 지친 새들에게
보금자리 다 내주고 새까맣게 잘 익은 씨
양식으로 풍족하게 먹여주는 축복의 나무여
땅이 새 생명을 품고 서로의 영양분을 녹여내며
맺어진 끈끈한 사랑 속에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산을 옮긴다고 말씀하신 주님
메마른 삶의 텃밭에 은총의 단비로 숲을 만들고
세상을 더욱 따뜻하고 풍요롭게 하소서
불꽃 하나가 울창한 산을 태우듯이
미지근한 믿음에 불을 지펴 주십시오.

새벽 문을 여는 붉은 햇덩이 위에도
저녁노을이 지는 깊은 산자락에도
쉴 새 없이 복음의 씨앗을 뿌리시는 주님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섬길 수 있는 마음을 주십시오.
당신의 말씀이 살아서 우리 안에 
아주 느리게 조금씩 움직이고 있습니다.

추수 때 알곡으로  당신의 곳간에 들일 수 있도록
열매 맺는 삶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주저앉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소서.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지혜를 주셔서 매일 깨닫게 하시고
슬픔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십시오.

하느님 나라가 엄청난 큰 나무로 자라서
땅위의 모든 민족과 나라가 새 떼처럼 몰려와
깃들이는 충만한  날들이 당신의 처절한 희생 위에
새롭게 펼쳐졌음을 오늘 눈물로 기억하게 하소서

피는 생명입니다

6/9/2012

 

설 금호(마리아)  

뒷마당의 데크 옆에는 에어컨디션을 가리는 어린 나무가 있습니다. 쉬지 않고 자라던 나무는 에어컨을 침범해 갔습니다. 가위를 들고 나무로 다가간 순간, 날카로운 부리로 머리를 찍을 듯한 공격적인 기세로 덤비며 요란하게 우는 새 두 마리, 때 마침 집안에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잠시 후 저는 다시 나무로 다가서는데 역시 새들이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비로소 울음의 느낌이 다른 듯 했으나 의미는 알 턱이 없었고 알 수 없는 공포로 전정 계획은 취소를 했습니다. 남편의 말대로 과연 자그마한 새집 안에는 3개의 알이 있었습니다. 

그토록 울부짖던 한낱 미물의 모성애 앞에서 숙연해진 저는 일단 전정을 미뤘었습니다. 나무는 더욱 퍼져가는 사이에 알은 아기 새로 부화가 되었지만, 더 이상 전정을 미룰 수 없게 되자 조심히 곁가지부터 쳐나갔습니다. 간결해진 나무를 보면서 말했습니다. “햇빛과 통풍이 잘되니 어서 자라라” 먹이를 달라고 입을 벌리는 아기 새들을 보는 것은 매일의 즐거움이었습니다. 다음날도 아기 새를 보러 갔습니다. 그러나 새들의 가족은 보이질 않았습니다. 아직도 빨간 알몸이던 새가 날아 갈 리가 없다 생각하며 마침 발 앞에 떨어진 양말을 주우려던 찰라. 저의 온몸에 사악함의 전율이 흘렀습니다. 죽은 새끼 새들을 보았기 때문에. 

겨우 새집만 지탱하던 나무는 간밤에 불던 바람에 몹시 시달렸던 모양이었습니다. 결국 참을성 없는 저는 얼마간을 참지 못하고 사정없이 나무를 쳐 냈던 탓에 새들을 죽였던 것이었습니다. 이미 후회마저도 늦어버린 상황 앞에 그도 자연의 한 부분임을 하찮게 여긴 죄책감으로 그 날을 보내던 밤, 꿈을 꾸었습니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새의 한 장면 이었지요. 바닷가를 걷는데 갑자기 날아든 갈매기가 저의 이마를 쪼아서 많은 피가 흘렀습니다. 비명을 지르며 집으로 돌아온 저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습니다. 집안 한가득 들어찬 새들이 노려보며 “산과 강과 계곡을 내가 창조했다. 너를 패하고자 검을 가져왔어(에스6장) 너는 나의 아기를 죽인 악마다 악마” 내 비명소리에 잠이 깬 저는 영화장면을 꾼 꿈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순간 내 순서의 금주의 묵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데나 죽음의 행실을 버리게 하고”(히브리,9,11) 왜? 예수님은 피로 흠 없는 재물이 되셨을까. 피 말고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 않으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피의 의미를 알 수 없었습니다. 건축업을 하던 아버지는 집을 질 때마다 닭의 피를 기둥에 뿌리는 이유를 묻자, 악귀들을 쫓는다고 했습니다.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온전히 생명을 유지했었지요. 아! 피는 생명이었군요. 나를 구원코자 생명이신 피를 흘리셨고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사탄으로부터 생명을 지키려고 피를 바르는 일을 무신론자인 아버지도 아셨던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이렇듯 피의 의미는 누구에게나 생명이라는 것을 이제 분명히 알려 주셨군요. 

늘 새소리가 들리면 죽은 새들을 의식하던 저에게 하느님은 꿈속에서 피를 흘리게 하셔서 죄의식을 치유해 주셨던 것을 믿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저를 속속들이 거울처럼 환히 드려다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이시기에. 그분을 위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악기로 새소리를 내어 봅니다. 새들의 화답이 들려옵니다. 이제부터 넌 무죄야. 자유라구!

봄날은 간다

6/1/2012

 
함 태기 루까

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 아직까지 마음이 저려 오는 건 
그건 아마 사람이 피고 지는 꽃처럼 /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이야
아마도…….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들
가만히 눈감으면 잡힐 것 같은…….  아련히 마음 아픈 추억 같은 것들…….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인데 화창하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라는 단어에 “날” 자가 하나 붙으면 어딘지 모르게 오히려 쓸쓸해 보입니다. 19살 낭창낭창한 가슴에 까르르 웃음만이 있을 듯한 연분홍 나이. 사내라면 세상 무서울 것이 없던 나이. 눈을 감으면 항상 아련한 저 언덕너머의 추억. 봄날은 무심히 오고가면서 그리운 날은 켜켜이 추억으로 싸이고 봄날은 갑니다.

세대마다 봄을 느끼는 감각은 다르게 다가옵니다. 젊은이에게는 봄은 활력과  희망으로 다가오지만 좀 더  나이든 세대에게는 봄이어서 오히려 무심히 지는 꽃잎을 보면서 자기의 삶을 추억하게 됩니다. 누구에게라도 인생에 있어서 클라이맥스 즉 봄날은 어느 형태로든 존재하게 됩니다. 그 인생의 절정을 느끼지 못하다가 이미 멀리 지난 후에 그때가 봄날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삶이란 우리가 매일 부닥치는  오늘이며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는 소멸로 가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절정에서 소멸로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누구나 부부간에 자식 간에 그리고 경제적 문제와 병고로 인생 후반기에는 나름대로 무거운 짐을 하나씩 지게 됩니다.

지난주에 영주권이 아직 해결 되지 아니하고 영위하는 비즈니스도 시원치 아니하여 제법 똑똑한 아이들을 제대로 된 대학에 못 보내고 휴학과 복학을 거듭하다가 중도에 포기케 한 "A"라는 분과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의 장래를 위하여 이민을 왔건만 오히려 대학조차 졸업을 못시키고 여전히 생활은 궁핍하여 “A” 는 절망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저와 별로 가깝지도 아니하고 그리하여 별로 왕래도 없는 그가 나에게 담담히 소주잔을 넘기면서 인생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내 인생의 봄날은 이제 갔다고......”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을 살지만 우리는 서로 남남 일수밖에 없음을 압니다. 배우자에게서 자식에게서 그리고 여러 사람들 틈에서. 세상에게서 우리는 언제인가 혼자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가끔은 이 지긋지긋하고 계속되는 고달픔 속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이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외롭다고 힘들다고 느끼는 것이 삶의 모습입니다. 삶이 지쳐갈 때 우리는 허망함을 말합니다. 

“A”에게 이것을 통해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어느 형태로든 봄날은 가고 있어.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어. 지금 어찌한다고 별로 달라질 것이 없는 현실에서 차분히 현실을 바라보고 인정하는 길이 최선이야. 너는 지금 외롭고 지쳐있어. 친구가 필요해. 언제라도 너의 초라하고 못난 모습을 그냥 바라보고 너 의 말을 들어줄 친구가 필요해.” 

그리고 조용한 성당의 한 귀퉁이에서 한번 실컷 울어봐. “주님 아시지요? 제 맘을.” 하고 기도하다보면  봄날을 보는 눈이 좀 변하고 새로운 마음이 생길수도 있어. 너만 외로운 것이 아니야. 우리는 모두 이렇게 세상을 이겨나가고 있음을 알게 될거야.


     

May 26th, 2012

5/26/2012

 

끌고 미는 무덤덤한 평화에 대한 소견

강남옥 율리아 

둘째 고모가 맞선을 볼 때였습니다. 시골에서 얌전히 집안일만 하던 고모는 살빛이 희고 얼굴이 둥글납작하고 세상에서 우리 조카들만큼 예쁜 아이들을 못 보았다고 늘 말하던 ‘고슴도치’과 한국 고모셨습니다. 동네가 훤해지도록 훤칠한 총각이 전답께나 있다는 집 딸내미에게 장가를 들겠노라 맞선을 보러왔었습니다. 곁방에 겸상을 차려준 엄마와 작은 고모들은 곁방에 딸린 쪽문에 붙어 귀도둑이 되었습니다.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저도 그 곁에 맹렬히 들러붙어 엄마와 고모들을 실소케 했습니다. 저는 그때, 태어나서 가장 멋있는 문어체의 문장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갱년에 접어들어 그 생생하던 멋진 말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합니다. “남자가 앞에서 리어카를
끌면 여자는 뒤에서 밀어주어야 한다.”라는 요지의, 경제개발 5개년 시대의 시대적 특성이 가미된 멋진 총각의 말이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 춘원의 ‘무정’을 읽을 때까지 그 보다 더 멋진 문장은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저와 함께 사시겠다고 오셨을 것이라는 것, 제 생의 리어카를 앞에서 끌고 가신다는 것쯤은 배워서 잘 압니다. 도미 전이니 20년도 더 넘은 일입니다. 대구 가톨릭신문사에 있던 친구를 따라 ‘대건 고등학교’로 기억되는 강당엘 간 적이 있습니다. 특이한 것에 혈안이 된 치기어린 나이의 기자 친구가, 자신을 포함해 ‘삼위일체’가 아닌 ‘사위일체’를 외치던 살짝 맛이 간 아줌마를 따라잡는 것을 돕느라 저도 바빴습니다. 집회장의 앞에서는 다리를 저는 사람이 나았고, 또 어떤 어떤 사람이 나았다고 했습니다. 성령대회였습니다. 그 집회가 뭔지도 몰랐던 저는, ‘참말로, 이 백주에 인간들이 뭐? 절름발이가 나았다고? 이 정신 나간 무리들이 있나?’ 싶어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와서 성령대회란 것을 가게 되었습니다. 울고 웃고 자빠지는 사람들이 모두 ‘집단 최면’에 걸렸다고 생각했고, 나도 그 최면에 걸리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당최 체득되지 않는 그 최면을, 큰 소리로 말하고 큰 동작으로 휘저으면 내 것이 될 것이라 희망했습니다. 안 되더군요. 세월이 조금 흘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성당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로 고민합니다. 30분의 미사 시간을 번다고 내가 할 수 있는 덤의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합니다. 막판까지 뻗대다가 벌떡, 일어나 씻고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주님 감사합니다, 저를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뻗대는 마음을 이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합니다. 일찍 준비해 가는 날도 물론 있습니다.

 앞에서 끄는 존재와 불화하면서 뒤에서 밀지 않고 뻗대는 것, 그 중에서도 성령님과 손발을 맞추지 않고 뻗대는 것처럼 불안하고 평화스럽지 못한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침마다 저를 막판에라도 몰고 가시는 분이 성령님이라고,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때로 막히고 때로 걸려도 어쨌거나 흐르는 대로 흘러온 생입니다. 제 어머니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하이고~ 우째 살았는지 모르겠다.”라는 것입니다. 저 역시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모르겠다.’는 말 속에는 제 어머니가, 그리고 제가 몰랐던 뭔가가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모르겠는 그것, 그 힘, 그 이끎의 주체가 성령님이라고,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제게만 오시지 않고, 옆에 앞에 뒤에 앉은 모든 이들에게 눈물로 몸 뒤틀림으로 이상하고 바보 같은 소리로 오시던 성령님의 편애를 탓하지 않겠습니다. 제게는
‘징후 없음’으로 오셨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제게는, 우리에게는, 모든 언어로 번역된 성경이 있지 않습니까? 각자의 언어로 듣고 읽을 수 있는 성령님께서 오신 오늘입니다. 성령님의 말씀은 너무 쉬워서 어리둥절합니다. 그 쉬운 말씀을 생활 속에서 구체화하기까지의 거리 속에 제 믿음이 엉거주춤 서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제게 하시는 말씀이 이제는 더 이상 멋지지 않습니다. “내가 앞에서 끌면 네가 뒤에서 잘 밀고 따라오너라.” 좀 더 멋진 말로 저를 꼬드겨보라고 퉁박을 놓고 싶습니다. 어떻게 밀고 끌었는지 모르지만 고모부님과 고모님은 아직도 해로하고 계신 중이고, 밀었던 뻗대었던 저 역시 그 분과 해로하리라 생각합니다. 가끔 바가지를 긁으면
리어카를 세워놓고 기다리시지만 결코 후진은 않는 성령님은 대단한 고집쟁이이십니다.

하지 감자

5/11/2012

 
박 준업(스테파노)   

청자빛 하늘이 / 육모정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 연못 창포잎이 /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 여름이 흐른다 /  ...중략...  
나는 / 활나물, 호밥나물, 젓가락나물, 참나물 찾던 /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 나의 사람아 

노천명의 ‘푸른 오월’의 시 한 구절입니다. 주님의 푸른 순례가 한참입니다. 계절은 화려하고 생기가 충만   한데 옛날 어린 시절엔 모두 굶주리는 철이었습니다. 한해 제일 일찍 수확하는 감자가 있습니다. 보리타작하기 전인 6월에 들어있는 절기인 ‘하지’를 전후해 캐서 먹는데 이 감자는 우리가 겨울 내내 가을 농사 식량으로 살다가 봄이 되면서 모든 양식이 바닥이 나고 햇보리가 나올 때까지 연명하며 기다릴 수 있는 생명과도   같은 귀한 감자였습니다. 누렇게 익어가는 들의 보리를 보며 이 감자를 먹으면서 ‘보릿고개’를 넘었습니다. 울긋불긋 핀 꽃들과 초록색 잎은 우리에게  배고픈 철임을 알렸습니다.  

50년대 중반 시골 본당에는 당시 성 골롬반 선교회 신부님이 사목하고 계셨는데 외교력(?)이 아주 풍부해   미군 부대에서 감자를 얻어가지고 군 트럭에 싣고 오시면 수녀님들이 감자를 쪄 영양실조로 누렇게 뜬 주일 학교 어린이들에게 나누워 주셨습니다. 사람마다
배고픔을 넘긴 일들은 모두 다를 것입니다. 이 ‘보릿고개’를   넘는 동안 굶주려 통학 거리가 먼 학생들은 걷기가 힘들어 결석을 했고 잠정적으로 휴교 할 때도 있었습니   다. 혹 도시락을 싸온 학생은 조금씩 덜어서 점심이 없는 학생들과 나누워 먹곤 했습니다. 동족상잔의 전쟁과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런 일들을 겪고 살았습니다. 종래는 미국으로 부터 잉여 농산물을 무상으로   제공 받아 이 ‘보릿고개’를 해결했습니다. 누가됐던 며칠만 굶기면 빵 앞에 맥을 못 추고 인격마저 저버릴 수  있는 나약한  존재.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 동북부 대지진과 쓰나미 참사 때 고급 공무원이 무너진 건물 속에서 굶주림에 지쳐 손을 벌리며 울면서 밥을 달라던 초라한 뉴스 장면이 떠오릅니다.   
  
오늘 날에는 먹을 것이 지천이며 풍족한 생활용품 속에서 그토록 수없이 널려있는 감사 앞에 만족과 행복을 느끼기는커녕 불화와 불만족으로 괴로워하며 살고 있지 않는가. 감자 한 개라도 이웃과 걱정하며 나누어   먹던 순수했던 심성은 사라지고 명품이 판을 치는 시대에 와서는 천박한 세상으로 되어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서,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명령적인 주님의 사랑을 오늘날 이 사회에서 실천하며   주님 백성으로서 일상생활에 어떤 삶으로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 가야될지 묵상해 봅니다. 다음 달에 ‘하자’가  들어 있습니다. 오늘은 식탁에 껍질을 까지 않고 찐 붉은 감자가 놓여 있습니다. 감자 하나를 집어 껍질 채 먹어 봅니다.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허기졌던 시간들이 떠오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는 가지이다

5/5/2012

 
김 웅옥(카타리나) 

매일 쳇바퀴 도는 듯한 삶속에서 아침에 깨어나  창밖을 내다보며, 매일 같이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    는 밖의 모습은, 나에게 주신 오늘 하루의 소중함과 또한 잠시나마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을 주심에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답니다. 

오늘은 지난겨울 눈보라치는 폭풍을 견디지 못하고 잘려 나가 말라 버린 나뭇가지들을 바라보며, 오늘의 복음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지금까지 나는 모든 일은 내가 스스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내가 열심히 일을 하면 무엇    이든지 이루어지며, 그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용을 쓰고, 밤을 새며 일을 한다고해도,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것은 이루어 질수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나는 주님의 가지이므로, 모든 일에는 주님이 주인이 되어야, 내가  열심히 하는 일도 이루어 질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자신에 대해서 너무 자존심이 강했습니다. 이 자존심 때문에 주님을 내 안에 모시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더욱더 힘들었습니다. 나의 삶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 미워졌었고, 실망과 분노로 자신을 내동댕이 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귀한 존재이며 주님이 사랑하는 자녀이며 주님의 가지이므로  그 안에 머물러야 나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네 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그중 한 아이는 길을 잃어버린 양이 되어 이리 저리 방황하는 것을 보는 나의 마음은 몹시 아팠습니다. 나는 자식의 마음을 전혀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은 나와 눈을 마주하려고도 하지 않으므로 대화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할 수가 없었던 나는 한 손은 주님의 손을 잡았고 다른 손은 길을 찾기 위해 방황하는 아들의 손을 잡고 뛰었습니다. 얼마를 달렸을까요, 눈을 뜨고 보았더니 내가 주님의 손을 잡고 뛴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의 손 뿐 아니라 아들의 손까지 꼭 잡고 달려가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줄기이고, 나는 가지이므로 줄기인 주님이 없다면, 말라 버린 가지같이 나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의 가지라는  것을 알고, 그 안에 머물려고 노력했더니, 주님은  사랑으로 나의 손을 잡아 주시어, 일어설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포도가 열매를 맺으려면 줄기를 꼭 붙잡고 영양분을 골고루 보충해야 풍성한 열매를 얻을 있습니다. 그와  같이 나도 구원의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주님을 꼭 붙잡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영양분을 골고루 마셔야 사랑의 포도가 주렁주렁 열릴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가 다가가기만 하면 우리를 얼싸    안고 모든 고통의 길을 같이 가시면서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예수 오빠와 나의 성소

4/27/2012

 
강 경숙 (멜라니아)  

그 자매님은 내 귀에 입을 대고 간절한 마음으로 속삭였습니다. “오빠, 예수오빠! 멜라니아예요!” 그리고     신부님께서는 내 머리에 성령안수 예절을 베푸셨습니다. 순간, 온몸과 영혼을 뒤흔드는 전율 속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삼십 여 년 전, 눈물조차 메말랐던 인생의 사막 한가운데 내가 서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예수 오빠를 만났습니다. 오빠가 없었던 나에게, 그 감동어린 호칭은 나의 전부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땅위에 이처럼 위대한 이름이 또 있을까요? 하늘아래 이처럼 강력한 이름을 가진 분이 또 있을까요? 내 생애 중, 계곡의 폭포수처럼 희열이 쏟아질 때마다, 힘들고 고통스런 항해에서 역풍을 만날 때마다, 예수  오빠는 나의 둘도 없는 지지자였습니다. 아니 평범한 일상의 순간 순간 마다에서도, 작은 풀꽃의 기쁨으로     되뇌이는 소중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예수오빠! 진정 그분은 아름드리 큰 가슴으로 나를 껴안아 주십니다.  

절대자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다른 모든 것에서 떠나고 싶어집니다.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분을 따라갑니다. 그렇게 특수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을, 우리는 지극한 존경과 축복의 극치로 바라봅니다. 예수 오빠를 만났을 때, 저는  그 길에서 이미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걸어야 할 또 다른 길이 있음을 그분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길을 가는 것은 첫째, 나에게 주어진 삶이 그 분 때문에 행복해야만 하는 것, 둘째, 죽는 날까지 나의 힘의 원천은 그 분께 있음을 잊지 않는 것, 셋째, 세상 속에서 내가 그 분의 가족임을 알리는 것, 넷째 나와 연관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연관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그분의 사랑으로 챙겨야 하는 것, 그래서 그분이 몹시도 만나고 싶어 하는 이들을 그분께로 데려오는 것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12.48-50) 하신 말씀처럼 과연 그분은 우리의 큰 오빠이고 맏형님이며, 아버지께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분입니다. 그분께로 가는 수많은 길들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모습대로 그 한분의 목소리를 들으며 걸어갑니다. “멜라니아야!” 하고 친근하게 내 이름을 부르시는 목소리가 영혼 안에 메아리칠 때, 나는 어린 동생처럼 그분께로 다가갑니다. 

오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진정한 혈연의 동생으로 살기위해 신실한 마음으로 그분의 집 문턱을 넘는 아침마다, 오빠는 높은 십자가 위에서 두 팔 벌려 반가워하십니다. “왔니?” 그 웃음 뒤, 당신을 죽여  나를 살리신 지고한 사랑의 신비를 읽으며 가슴이 아립니다. 해서 오늘도,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려 애쓰며, 내 성소의 완성을 위해 지침 없는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주님의 건강 비법은 무엇입니까?

4/20/2012

 
이 상인 (브르노)

수선화 개나리 곱게 핀 화창한 봄날입니다. 지루한 경기 침체로 우울한 일상들이지만 주님은 부활과 함께 자연의 아름다운 꽃들을 우리에게 선물하여 주셨습니다. 비록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서러워하거나 노여워 마십시오. 그냥 그러려니 힘들고 지친 시간이 가고 나면 반짝이는 햇살이 오듯이 우리를 다시 밝게 하리라는 희망과 배짱으로 사십시오.

까맣게 그을린 얼굴이 때늦은 중노에 농부라도 된 기분입니다. 텃밭이 제법 쏠쏠하다 보니 약초며 화초며 채소 나물들이 그야말로 작은 식물원을 이루듯이 울창해졌습니다. 올해도 토마토, 고추, 오이, 호박, 쑤세미, 아주까리 정도를 심어볼까 모종에서부터 텃밭 고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런 일에 빠져 시간도 잊고 사는 맛이란 체험해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는 즐거움이지요. 작은 정성과 노력하는 만큼의 수확이 있고 그로 인한 작은 나눔이라는 삶의 소중한 진리를 몸소 체험하게 되는 효과도 빼놓을 수 없는 기쁨입니다. 

살아가면서 가장 절제하기 어려운 다섯 가지를 동의보감에서는 ‘양생오난’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명예와 이익을 버리지 않고 탐내어 조바심하는 것. 둘째, 기쁨과 노여움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 셋째, 불건전한 여흥이나 여색을 멀리 하지 않는 것. 넷째, 맛난 음식과 술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 다섯째, 정기와 신기기 허하여 흩어지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동의보감은 이의 양생을 위해서 7가지 계율을 게을리 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습니다.  첫째, 언어를 고르게 하고 말을 많이 하지 않아 체내의 기운을 키워야 하고, 둘째, 색욕을 경계하여 정기를 키워야 하고, 셋째, 잡기에 빠지지 말아 혈기를 돋우어야 하고, 넷, 침을 함부로 뱉지 말아 내장의 기운을 길러야 하고, 다섯째, 분노를 삼가 해 간 기운을 키워야 하고, 여섯째, 음식을 탐하지 말아 위장의 기운을 길러야 하고, 일곱째, 사려 과도로 상심하지 말아 심기를 키워야 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동의보감에서 강조하는 건강 비결은 초탈의 사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장님을 눈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낫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게 하신’ 기적을 보이시고, 하신 말씀은 ‘다시는 죄짓지 말라’ 는 소박하고 엄중한 말씀이셨습니다. 예컨대, 병을 다스리고자 하면 먼저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도에 합당하게 하며 병자로 하여금 모든 마음속의 의심이나, 걱정, 생각 모든 망념을, 모든 불평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조그만 겨자씨에도 거대한 수미산을 담을 수 있고, 한 올의 하찮은 터럭 속에도 우주 만물을 끌어안을 수 있으며. 이슬 같은 육신이나 갈대 같은 몸속에도 위대한 영혼을 충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또 한 번 주님의 위대한 건강비법이 숨어 있습니다. 믿고 따르기만 하여도 절로 얻어지는 이 소중한 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실행하여 보는 한 주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4/7/2012

 
 양 경숙(미쉘)

뿌옇게 내려앉은 아침 안개 속에
넙죽하게 드러누운 들꽃마저 눈물을 떨구며
당신의 참혹한 죽음을 침묵으로 말하고 있을 때
욕심으로 찢기고 상처 난 마음의 돌무덤을 열어 주십시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 많은 인간들이
채찍질을 하며 침뱉고 조롱하는 것을 견디며
홀로 가신 그 길은 거룩한 가시밭 길

 칠흑 같은 동굴 속의 어둠이
새벽잠을 자는 산과 강을 두드려 깨울 때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깊은 절망과 두려움에 떨며
당신의 무덤으로 달려 간 그 연둣빛 사랑을
오늘 가슴마다 새싹으로 피어오르게 하소서  

이 세상 모든 죄 짊어지고 어린양처럼 희생된 주님이시여
 무덤 앞을 막았던 무거운 돌덩이 굴러가고
 텅 빈 무덤 속에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의 따스함
당신의 부활을 알려 준 천사들의 기쁜 노래 소리
눈부신 빛이 온 대지를 가슴에 품고 어루만질 때
절망과 고통에 묶인 삶의 족쇄를 땅에 묻었습니다.    

짧은 하루, 짧은 우리의 생애 한 가운데에
바람처럼 나타나 살아 있는 말씀들 입에 넣어 주시고
하이얀 천사의 옷 입혀 주시는 주님
어둠 속에서 쓰러질듯 자갈밭 걸어 갈 때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을 때도 
언제나 함께 계심을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한 생애는 굽이굽이마다
병들고 죄 많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가장 잘 익은 사랑의 언어로 희망의 깃발 건네며
눈물의 강을 걷게 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겨 내고 빛 속으로 살아오신 주님
텅 빈 무덤 안에서 부활과 사랑은 한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미움이 사랑을 이길 수 없고 폭력이 평화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진리 앞에서 겸손한 기도 엮어서 당신께 바치렵니다.     

언제나 당신을 향해 귀를 열어 놓아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건망증 때문에
당신의 처절한 고통을 잊고 살았음을 용서하십시오.     

죽음의 손에서 인류를 구원하신 주님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4월의 강가에서
흘러도 흘러도 마르지 않는 사랑의 씨앗 뿌리며
갈릴래아로 가서 부활하신 당신 뵙겠습니다.

하느님의 생기 없이는 그 어느 것도

4/1/2012

 
설 금호 (마리아)

노트 다섯 장만한 크기의 나의 텃밭, 그 5분의 1에는 이미 장미 한 구루와 부추가 심겨져 있습니다. 나머지에는 무슨 채소를 심을까 아주 많은 궁리를 했습니다. 야채 종류가 많아선지 나의 텃밭이 작은 것인지 선택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심고 싶고 저것도 심고 싶고 이걸 심으면 뭘 해먹고 저걸 심으면 뭘 해먹을 수 있는데…… 

상념만 키우다 어느 날 결국 오이와 깻잎, 고추, 토마토를 선택했습니다. 오늘은 겨우내 비었던 텃밭에 새로 올 귀여운 모종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흙을 뒤집고 잡초도 뽑고 움푹 패인 곳에 흙을 더하던 중 미처 뽑아내지 못한 실처럼 말라버린 오이 줄기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마른 그 줄기를 걷어내면서 지난해 오이와 더불어 즐거웠던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몇 번 오이를 심었지만 자라면서 모양 없이 휘거나 미처 크기 전에 떨어져 버리곤 했습니다. 이유를 수소문 하던 차에 인터넷과 농장주에게서 올바른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오이는 수분이 많은 채소이기에 많은 물이 필요하고 한 낱의 더위에는 잎과 줄기가 타버린다는 사실을……

아침저녁으로 물은 물론, 한여름에는 우산으로 햇볕을 가려주었습니다. 그래도 밑의 잎들은 마르면서도 새순들을 내면서 오이는 힘차게 줄기를 뻗어냈습니다. 그리고는 노란 꽃이 피었나하면 어느 사이 아기 발가락만한 오이들이 마디마디에서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오이는 드려다 본지 몇 시간 지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훌쩍 자라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어찌나  기쁘던지 ‘내 마음은 주님이 지어내신 작은 궁전’ 에 있는 듯 했습니다. 

하루는 줄기들을 매어주다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미처 매주지 못한 줄기가 뜻밖에도 위로 곧게 서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옆 줄기를 묶은 끈에서 풀린 눈에도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실을 넝쿨손이 꼭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누가 그것을 가르쳐 주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어디선가 스스로 보고 들은 것처럼 놀라운 그 지혜(?)는 참으로 신기하고 경이로웠습니다. 오이는 넝쿨손들을 이용해 햇볕을 찾아 쭉쭉 위로 올라서는 그 여린 새싹의 힘! 그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요? 

바로 하느님의 입김, 그 힘의 작용이었습니다. 작은 씨앗 하나, 그 속에 들어앉은 씨앗보다도 더 작은 씨눈이 생명이었습니다. 그 생명은 스스로 싹을 틔었을까요? 하느님의 힘. 그 생기 없이는 오이는 물론, 아름드리 고목이나 길가의 작은 풀 한포기도 떡잎은 고사하고 실뿌리 한 가닥 내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유전자가 작동해야지만 싹이 트고 잎이 나고 꽃을 피우고 열매가 열리게 되는군요. 이들은 주신 생기를 향하여 맡겨 주신 역할을 위해 충실하게 순명합니다. 마치 무릎을 꿇고 입을 모아 그리스도를 찬미하며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찬양하는 것처럼 (필립 2,11)

저는 오이의 이 넝쿨 손 보다 몇 백배 더 훌륭한 10개의 손가락을 가진 두 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앙을 위해 무엇을 잡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옷자락에서 가는 실밥 하나라도 잡아야 하는데 왜? 내 눈은 장님처럼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일까. 오이의 넝쿨손만도 못한 내 손으로 인해 지탱 할 곳 못 찾아 땅위로 나동그라지면 어쩌려고, 

겨우내 모든 식물들이 하느님의 생기로 인하여 일제히 깊은 잠속에서 힘차게 일어섰습니다. 마치 고운 소리로 예수님의 부활의 기쁨을 노래하려는 듯이…… 저의 두 손도 올해의 부활을 꼭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생기에 순명하기 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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