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금호 (마리아)
노트 다섯 장만한 크기의 나의 텃밭, 그 5분의 1에는 이미 장미 한 구루와 부추가 심겨져 있습니다. 나머지에는 무슨 채소를 심을까 아주 많은 궁리를 했습니다. 야채 종류가 많아선지 나의 텃밭이 작은 것인지 선택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심고 싶고 저것도 심고 싶고 이걸 심으면 뭘 해먹고 저걸 심으면 뭘 해먹을 수 있는데……
상념만 키우다 어느 날 결국 오이와 깻잎, 고추, 토마토를 선택했습니다. 오늘은 겨우내 비었던 텃밭에 새로 올 귀여운 모종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흙을 뒤집고 잡초도 뽑고 움푹 패인 곳에 흙을 더하던 중 미처 뽑아내지 못한 실처럼 말라버린 오이 줄기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마른 그 줄기를 걷어내면서 지난해 오이와 더불어 즐거웠던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몇 번 오이를 심었지만 자라면서 모양 없이 휘거나 미처 크기 전에 떨어져 버리곤 했습니다. 이유를 수소문 하던 차에 인터넷과 농장주에게서 올바른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오이는 수분이 많은 채소이기에 많은 물이 필요하고 한 낱의 더위에는 잎과 줄기가 타버린다는 사실을……
아침저녁으로 물은 물론, 한여름에는 우산으로 햇볕을 가려주었습니다. 그래도 밑의 잎들은 마르면서도 새순들을 내면서 오이는 힘차게 줄기를 뻗어냈습니다. 그리고는 노란 꽃이 피었나하면 어느 사이 아기 발가락만한 오이들이 마디마디에서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오이는 드려다 본지 몇 시간 지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훌쩍 자라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어찌나 기쁘던지 ‘내 마음은 주님이 지어내신 작은 궁전’ 에 있는 듯 했습니다.
하루는 줄기들을 매어주다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미처 매주지 못한 줄기가 뜻밖에도 위로 곧게 서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옆 줄기를 묶은 끈에서 풀린 눈에도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실을 넝쿨손이 꼭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누가 그것을 가르쳐 주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어디선가 스스로 보고 들은 것처럼 놀라운 그 지혜(?)는 참으로 신기하고 경이로웠습니다. 오이는 넝쿨손들을 이용해 햇볕을 찾아 쭉쭉 위로 올라서는 그 여린 새싹의 힘! 그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요?
바로 하느님의 입김, 그 힘의 작용이었습니다. 작은 씨앗 하나, 그 속에 들어앉은 씨앗보다도 더 작은 씨눈이 생명이었습니다. 그 생명은 스스로 싹을 틔었을까요? 하느님의 힘. 그 생기 없이는 오이는 물론, 아름드리 고목이나 길가의 작은 풀 한포기도 떡잎은 고사하고 실뿌리 한 가닥 내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유전자가 작동해야지만 싹이 트고 잎이 나고 꽃을 피우고 열매가 열리게 되는군요. 이들은 주신 생기를 향하여 맡겨 주신 역할을 위해 충실하게 순명합니다. 마치 무릎을 꿇고 입을 모아 그리스도를 찬미하며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찬양하는 것처럼 (필립 2,11)
저는 오이의 이 넝쿨 손 보다 몇 백배 더 훌륭한 10개의 손가락을 가진 두 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앙을 위해 무엇을 잡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옷자락에서 가는 실밥 하나라도 잡아야 하는데 왜? 내 눈은 장님처럼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일까. 오이의 넝쿨손만도 못한 내 손으로 인해 지탱 할 곳 못 찾아 땅위로 나동그라지면 어쩌려고,
겨우내 모든 식물들이 하느님의 생기로 인하여 일제히 깊은 잠속에서 힘차게 일어섰습니다. 마치 고운 소리로 예수님의 부활의 기쁨을 노래하려는 듯이…… 저의 두 손도 올해의 부활을 꼭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생기에 순명하기 위해서요.
노트 다섯 장만한 크기의 나의 텃밭, 그 5분의 1에는 이미 장미 한 구루와 부추가 심겨져 있습니다. 나머지에는 무슨 채소를 심을까 아주 많은 궁리를 했습니다. 야채 종류가 많아선지 나의 텃밭이 작은 것인지 선택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심고 싶고 저것도 심고 싶고 이걸 심으면 뭘 해먹고 저걸 심으면 뭘 해먹을 수 있는데……
상념만 키우다 어느 날 결국 오이와 깻잎, 고추, 토마토를 선택했습니다. 오늘은 겨우내 비었던 텃밭에 새로 올 귀여운 모종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흙을 뒤집고 잡초도 뽑고 움푹 패인 곳에 흙을 더하던 중 미처 뽑아내지 못한 실처럼 말라버린 오이 줄기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마른 그 줄기를 걷어내면서 지난해 오이와 더불어 즐거웠던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몇 번 오이를 심었지만 자라면서 모양 없이 휘거나 미처 크기 전에 떨어져 버리곤 했습니다. 이유를 수소문 하던 차에 인터넷과 농장주에게서 올바른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오이는 수분이 많은 채소이기에 많은 물이 필요하고 한 낱의 더위에는 잎과 줄기가 타버린다는 사실을……
아침저녁으로 물은 물론, 한여름에는 우산으로 햇볕을 가려주었습니다. 그래도 밑의 잎들은 마르면서도 새순들을 내면서 오이는 힘차게 줄기를 뻗어냈습니다. 그리고는 노란 꽃이 피었나하면 어느 사이 아기 발가락만한 오이들이 마디마디에서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오이는 드려다 본지 몇 시간 지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훌쩍 자라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어찌나 기쁘던지 ‘내 마음은 주님이 지어내신 작은 궁전’ 에 있는 듯 했습니다.
하루는 줄기들을 매어주다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미처 매주지 못한 줄기가 뜻밖에도 위로 곧게 서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옆 줄기를 묶은 끈에서 풀린 눈에도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실을 넝쿨손이 꼭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누가 그것을 가르쳐 주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어디선가 스스로 보고 들은 것처럼 놀라운 그 지혜(?)는 참으로 신기하고 경이로웠습니다. 오이는 넝쿨손들을 이용해 햇볕을 찾아 쭉쭉 위로 올라서는 그 여린 새싹의 힘! 그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요?
바로 하느님의 입김, 그 힘의 작용이었습니다. 작은 씨앗 하나, 그 속에 들어앉은 씨앗보다도 더 작은 씨눈이 생명이었습니다. 그 생명은 스스로 싹을 틔었을까요? 하느님의 힘. 그 생기 없이는 오이는 물론, 아름드리 고목이나 길가의 작은 풀 한포기도 떡잎은 고사하고 실뿌리 한 가닥 내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유전자가 작동해야지만 싹이 트고 잎이 나고 꽃을 피우고 열매가 열리게 되는군요. 이들은 주신 생기를 향하여 맡겨 주신 역할을 위해 충실하게 순명합니다. 마치 무릎을 꿇고 입을 모아 그리스도를 찬미하며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찬양하는 것처럼 (필립 2,11)
저는 오이의 이 넝쿨 손 보다 몇 백배 더 훌륭한 10개의 손가락을 가진 두 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앙을 위해 무엇을 잡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옷자락에서 가는 실밥 하나라도 잡아야 하는데 왜? 내 눈은 장님처럼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일까. 오이의 넝쿨손만도 못한 내 손으로 인해 지탱 할 곳 못 찾아 땅위로 나동그라지면 어쩌려고,
겨우내 모든 식물들이 하느님의 생기로 인하여 일제히 깊은 잠속에서 힘차게 일어섰습니다. 마치 고운 소리로 예수님의 부활의 기쁨을 노래하려는 듯이…… 저의 두 손도 올해의 부활을 꼭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생기에 순명하기 위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