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남옥(율리아)
어린 시절 입에 붙은 노래나 금언은 때로 평생의 기억을 가지기도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위안부로 끌려가 질곡의 세월을 살았던 한 할머니가, 태국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한국말을 죄 잊었지만 놀랍게도 ‘아리랑’을 부르던 것을 TV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저도 가락만 들으면 자동으로 입에서 튀어나온 노래가 있으니, 전에 한 번 소개했던 원동교회 주일학교에서 배운 노래입니다.
하늘 계신 아버지/밥과 반찬 주시고/매일 먹게 하시니/항상 감사합니다. 라는, 춘궁기에 만들어졌을 법한 개발 도상 이전의 대한민국 어린이 용 식사 전 기도 노래와 하느님이 세상을/이처럼 사랑하사/독생자를 주셨으니/누구든지 주를 믿으면/멸망하지 않고/영생을 얻으리로다/영생을 얻으리로다. 라는 크리스천 핵심 기도 노래입니다.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아이들이 ‘독생자’니, ‘멸망’이니, ‘영생’이니 하는 어휘를 알 리가 없었겠지만, 언어의 역사성이랄까요? 반복 주입, 학습 되면서 자연스레 체득이 된 것입니다. 요즘은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고 노래 부르고 손뼉쳤지만 평생 그 사랑을 노래 가사로만 알고 살아온 것은 아닌가, 내 스스로 엎어지고 거꾸러지며 하느님을 탐구하는 와중에 눈이 번쩍 뜨이도록 확인한 사랑이 아니라, 타인의 체험과 간증으로 만들어진 노래 가사를 막연히 선험적 차원에서만 받아들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뭔일이 좀 풀리면 주님은 감사한 존재지만, 일이 조금이라도 꼬이면 도대체 주님께서 내게 해 주신 게 뭔가? 그 당장에 발칙한 생각을 하는 존재가 인간 아닙니까. 태어났으니 그 생명도 당연한 것 같고, 입에 밥 들어가니 그 먹거리도 당연한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애초 불가능한 존재가 인간 아닌가도 생각합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힘들다는 보편 공감대가 넓은 말을 두고 보면, 우리(나)의 이 발칙한 패륜은 이해 될 만하다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올인’ 아니면 ‘배신’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삶의 순간마다 해야 하는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도 ‘네가 차던지 뜨겁던지 않고 미적지근하면 뱉어버리겠다’ 하셨잖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저는 평생 회색분자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믿기는 합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참으로 인색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데 인색했던 정도의 만분의 일만, 세상의 쓸 데 없는 일에 관심과 시간 내주기에 인색했더 라면 백만장자 됐을 것입니다. 작은이에게 베푸는 사랑이 주님께 드리는 사랑이라는 것도 허전한 말입니다. 도대체 체험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국정 교과서(성경)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참고서와 영상 자료와 녹음 자료를 듣기도 합니다. 어떤 땐 낄낄대며 웃고, 어떤 땐 아, 그 사람 참 말 잘한다, 감탄도 합니다. 어떤 신부님의 녹음자료를 듣는데, 그 신부님 제가 알지도 못하는데 목소리만 듣고 눈물이 그냥 흘러내립니다. 제가 무슨 족집게라고 ‘나 같은 사람이 앞뒤 없이 우는 것으로 보아 필시 성인이로다!’ 판단합니다.
그리고 또 변명 거리를 찾아냅니다. 자라면서 공부할 때, 세상 물리 다 알고 했나? 하라니까 닥치고 하다 보니 이것저것 꿰맞추고 물리 터득했지~ 주님 사랑 아는데, 그 큰 사랑을 어찌 조감부터 하면서 시작할 수 있나? 그저 하라니까 하고, 외우라니까 외우고, 들으라니까 듣고 하다보면, 내 삶의 조각조각 안에 스며들어 있는 주님 사랑 퍼즐 맞추듯이 맞추고, 그 사랑의 그림 어렴풋이 보일 때가 있지 않겠나~ 말이나 못하면요. 그러면서 “으음…그래도 오늘은 좀 피곤하군, 그냥 자고, 누워서 저녁 기도 해도 마, 안 하는 것 보다는 나으리니…” 이렇게 하루하루, 도저히 ‘올인’ 되지 않는, 피 흘린 성인들 음덕 덕분에 이어져 온 좀팽이 같은 삶, 이어가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입에 붙은 노래나 금언은 때로 평생의 기억을 가지기도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위안부로 끌려가 질곡의 세월을 살았던 한 할머니가, 태국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한국말을 죄 잊었지만 놀랍게도 ‘아리랑’을 부르던 것을 TV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저도 가락만 들으면 자동으로 입에서 튀어나온 노래가 있으니, 전에 한 번 소개했던 원동교회 주일학교에서 배운 노래입니다.
하늘 계신 아버지/밥과 반찬 주시고/매일 먹게 하시니/항상 감사합니다. 라는, 춘궁기에 만들어졌을 법한 개발 도상 이전의 대한민국 어린이 용 식사 전 기도 노래와 하느님이 세상을/이처럼 사랑하사/독생자를 주셨으니/누구든지 주를 믿으면/멸망하지 않고/영생을 얻으리로다/영생을 얻으리로다. 라는 크리스천 핵심 기도 노래입니다.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아이들이 ‘독생자’니, ‘멸망’이니, ‘영생’이니 하는 어휘를 알 리가 없었겠지만, 언어의 역사성이랄까요? 반복 주입, 학습 되면서 자연스레 체득이 된 것입니다. 요즘은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고 노래 부르고 손뼉쳤지만 평생 그 사랑을 노래 가사로만 알고 살아온 것은 아닌가, 내 스스로 엎어지고 거꾸러지며 하느님을 탐구하는 와중에 눈이 번쩍 뜨이도록 확인한 사랑이 아니라, 타인의 체험과 간증으로 만들어진 노래 가사를 막연히 선험적 차원에서만 받아들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뭔일이 좀 풀리면 주님은 감사한 존재지만, 일이 조금이라도 꼬이면 도대체 주님께서 내게 해 주신 게 뭔가? 그 당장에 발칙한 생각을 하는 존재가 인간 아닙니까. 태어났으니 그 생명도 당연한 것 같고, 입에 밥 들어가니 그 먹거리도 당연한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애초 불가능한 존재가 인간 아닌가도 생각합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힘들다는 보편 공감대가 넓은 말을 두고 보면, 우리(나)의 이 발칙한 패륜은 이해 될 만하다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올인’ 아니면 ‘배신’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삶의 순간마다 해야 하는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도 ‘네가 차던지 뜨겁던지 않고 미적지근하면 뱉어버리겠다’ 하셨잖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저는 평생 회색분자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믿기는 합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참으로 인색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데 인색했던 정도의 만분의 일만, 세상의 쓸 데 없는 일에 관심과 시간 내주기에 인색했더 라면 백만장자 됐을 것입니다. 작은이에게 베푸는 사랑이 주님께 드리는 사랑이라는 것도 허전한 말입니다. 도대체 체험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국정 교과서(성경)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참고서와 영상 자료와 녹음 자료를 듣기도 합니다. 어떤 땐 낄낄대며 웃고, 어떤 땐 아, 그 사람 참 말 잘한다, 감탄도 합니다. 어떤 신부님의 녹음자료를 듣는데, 그 신부님 제가 알지도 못하는데 목소리만 듣고 눈물이 그냥 흘러내립니다. 제가 무슨 족집게라고 ‘나 같은 사람이 앞뒤 없이 우는 것으로 보아 필시 성인이로다!’ 판단합니다.
그리고 또 변명 거리를 찾아냅니다. 자라면서 공부할 때, 세상 물리 다 알고 했나? 하라니까 닥치고 하다 보니 이것저것 꿰맞추고 물리 터득했지~ 주님 사랑 아는데, 그 큰 사랑을 어찌 조감부터 하면서 시작할 수 있나? 그저 하라니까 하고, 외우라니까 외우고, 들으라니까 듣고 하다보면, 내 삶의 조각조각 안에 스며들어 있는 주님 사랑 퍼즐 맞추듯이 맞추고, 그 사랑의 그림 어렴풋이 보일 때가 있지 않겠나~ 말이나 못하면요. 그러면서 “으음…그래도 오늘은 좀 피곤하군, 그냥 자고, 누워서 저녁 기도 해도 마, 안 하는 것 보다는 나으리니…” 이렇게 하루하루, 도저히 ‘올인’ 되지 않는, 피 흘린 성인들 음덕 덕분에 이어져 온 좀팽이 같은 삶, 이어가고 있습니다.